지역 간 특성 있는 문학균형발전 방안
-제주 문협 50년사를 중심으로
김 관 후(소설가)
1. 지역문학이란 무엇인가
문단에서는 지금까지 '지방에 거주하는 문학인과 그 활동'을 지칭하여 지역문학이라 불러왔다. 지역문학인은 그 숫자에서 극히 소수에다 각종 활동 등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지방 식민지 같은 가련한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지역문학은 작가의 생활 근거지가 어디냐에 따라, 그리고 작품 내용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이 두 가지가 합일된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박태일의 “지역문학 연구는 실천적이어야 하며 대항문학이어야 한다” 는 주장은 자못 선언적이지만, 여기서 실천과 혁신을 양쪽에 거느린 ‘대항문학’이란 대체 무엇에 대항하는 문학일까. 중심부 문학에 대한 대항이라면 너무 비논리적이다. 중심부 문학이란 바로 중앙문학이기 때문이다. 한편 ‘대항’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중앙문학과는 다른 성격임을 강조한 송기섭이 “지역문학의 고유한 자아는 종속을 전제로 한 차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역량을 내포한 차이로 인식할 때 주체적 문학양식으로 존립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다’라는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이는 실제로 『토지』(박경리) ․『태백산맥』(조정래), 그리고 『순이 삼촌』(현기영) 같은 작품들에 의해 입증이 될 수 있다.
지역문학은 지역주민의 삶을 형상화시키는 작품이 우선되어야만 지역문학의 기반은 탄탄해져 한국문학의 초석이 됨은 물론, 세계문학의 보편성도 담보할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의 문학사와 그 민족문학사의 거대한 주류는 지역문학사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제주 지역문학의 진면목은 어디에 있는가. '제주문학'이라는 인식만으로는 너무 포괄적이어서 접근하기 어려운가. 제주문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문제가 '주변'과 '변방'이 문제이다. 제주 사람들에게 '주변적 인식'이나 '변방적 인식'은 언제, 어느 계층에서부터 어떻게 발생했을까. 탐라가 고려에 예속되면서 탐라개국 신화에서 '개국'이거나 '건국'이라는 불순한 언어를 박탈당하여 한낮 세 성씨의 씨족신화로 격하되면서부터가 아닐까. 억압적인 중앙의 상징적 폭력 앞에서 제주는 결국 주변이거나 변방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제주의 신화가 천지창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제주를 중심으로 세계상을 구성하고 해석하는 근원적인 상상의 공간을 이루는 단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 문학매체의 다변화 속에서 중앙과 지역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따라서 경계가 무너진 만큼 지역의 특수성을 간직한 문학이 보편성보다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성의 가치는 그냥 우리들 앞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전적 인식에 의해서 지역문학사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문학을 논의할 때 4․3문학을 그 중심부에서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4․3문학이 그 중심부에 설 수 있는 것은 4․3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먼저 존재하여 4.3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제주 사람들의 고통을 중심의지로 표현하는 데서 그 의의가 있다. 4․3문학은 지역공동체에 대한 실천행위를 밝혀내고, 지난날의 인습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문학이며, 한국문학의 중심부에서 그 역할을 담당하고 그래서 세계로 나아가는 문학을 말한다. 그렇다면 지역특성을 살린 문학행위는 그 역사적 현장에서 의미를 되찾을 수 있고, 그래서 문학의 균형발전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2. 제주문학은 어디서 출발할까
제주문단이라면, 그것은 제주문인들의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문단은 하루아침에 형성될 수 없다. 문단이 싹이 트려면 환경이 갖추어져야 한다. 어느 한 지역에 문단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먼저 문단 형성의 토양이 가꾸어지고, 거기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있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제주문단에 첫 씨앗을 뿌린 김문준(金文準 : 1893~1936) ․ 김명식(金明植 : 1891~1943 ) ․ 김지원(金志遠 : 1903~1927) 세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조천(朝天) 출신들이다. 조천은 예로부터 많은 유림학자가 배출되고, 조정에서 파견되는 유배자들의 출입이 빈번한 곳이다. 어느 마을보다도 먼저 정치상황을 체험했으며, 거기에서 강인한 기질과 성품을 배웠다. 그 결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먼저 생각하는 기질이 형성되었다. 일제식민지시대에 일제에 항거하는 불굴의 독립정신은, 그 당시 조천에는 일본인들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큰 사건은 1919년 조천만세운동이다.
김문준은 1915년 12월 조선총독부 농림학부 재학시절「農夫歌」를 집필하여 교지에 발표한다. 가사 형식을 빌어서 농민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농촌계몽 ․ 농민계몽의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그리고 1935년『民衆時報』를 창간하여, 오사카에 있는 조선인을 지원하며 민중운동 ․ 민족운동의 기관지로서 지도적 역할도 담당한다. 한시도 잘 지어 『朝天誌』에는 ‘문장초풍(文章超(風) 우국지사(憂國之士)’라고 그를 북돋우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도 이름을 날린 진보적 인사이다. 특히 호를 목우(牧牛)라고, 남쇠라는 재래식 공구로서 문지방의 호를 파는 기구이다. 남쇠가 되어 독립이란 문이 잘 여닫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김명식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조천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시 「새 봄」․「비는 노래」 두 편을 발표한다. 「새 봄」은 겨울로 상징되는 어두운 시절에서 벗어나, 봄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가 도래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고,「비는 노래」는 신문 창간을 감격적으로 노래한 축시다. 신문창간 축시가 당대의 최고의 시인에게 돌아가는 영예일 때 신문 창간 축시를 우리고장 사람이 썼다는 것, 그것이 제주문학의 시원이 된다는 것에 긍지를 가져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그가 쓴「로서아의 산 文學」(『新生活』1922.4) ․「戰爭과 文學」(『三千里文學』1938.4)은 대표적인 문학평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형 김형식(金瀅植)도 일찍이 『朝鮮文藝』(1917~1918)에 한시 2백여 편과 한문 30여 편을 발표한 바 있어, 이를 2004년 북제주문화원에서 『革菴散稿』번역본으로 출판하여 관심을 끈 바 있다.
“시조 주몽(始祖朱夢) 열린 땅에/ 천수제(天授(帝)가 지은 이름/ 산고수려(山高水麗) 장할시고/ 단목(檀木)에 운이 나고/ 근화(槿花)가 새로 필 때/ 동아일보(東亞日報) 탄강하다/ 영락제(永樂帝)제의 포부이며/ 을지공(乙支公)의 정신이며/ 원효(元曉)의 자비이며/ 왕인(王人)의 문화이며/ 서희(西熙)의 용맹이며/ 개소문(蓋蘇文)의 기개이며/ 신숭겸(申崇謙)의 혼백이며/ 성산문(成三文)의 구설이라/ 소리소리 정의(正義)이며/ 말말이 인도(人道)로다/ 남해는 깊고 깊고/ 백두는 높고 높다/ 동반도(東半島) 만년지(萬年紙)에/ 한양평원(漢陽平原) 벼루 삼고 / 한강은 연수(硯水) 삼고/ 남산은 먹을 삼고/ 송백(松柏)은 뭇을 매고/ 단목(檀木) 같이 굳은 뼈와/ 근화(槿花)같이 고은 고기/ 설총(薛聰))이 지은 말로/ 세종이 만든 글로/ 김생(金生)의 체를 받아/ 무궁무진 써 내어/ 남해 같이 깊은 내용/ 백두 같이 높이 들어/ 질풍악우(疾風惡雨) 겁치 않고/ 여천동수(與天同壽) 하오리다” 김명식의 「비는 노래」 전문이다. 김지원은 1924년 조선일보에 시 「깨어진 칠보탑」과 금성에 「나의 기원」을 발표했으며, 1925년 『朝鮮文壇』에「哀願」과 「거지 할미」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또 이듬해「에도(江戶)의 풍경」(조선일보) ․「유곽」(금성) ․ 「마즈막 올리는 祈禱」(조선문단) ․「火山의 노래」(조선문단) ․ 「NHIL」(조선문단) ․ 「허무의 왕국」(조선문단) 등 여러 편, 1927년 「울안의 盟誓」(동아일보) 등 여러 편, 1928년 「새해맞이」(조선일보)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의 작품은 시대상황과 당시의 심경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어떤 작품에서는 사회와 문명 비평적 시각도 매우 번득인다. 초기에 허무적인 작품을 발표했지만, 후기에는 사회적 자아에 눈을 떠 민족의 현실을 노래하였다. 그의 호적에는 “단기 4260(1927)년 5월 1일 오후 2시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2,152번지에서 사망, 동거자 金錫推 단기 4294(1961)년 8월 28일 신고”라고 되어 있다.
“날짐승도 제 말을 쓰거든/ 들짐승도 제 말을 쓰거든/ 하물며 사람에게 제 말이 없을까 보냐 // 집은 없어지고 세간은 잃었다 해도/ 혀는 뽑히고 두 손은 묶였다 해도/ 차라리 칼을 물고 엎어질망정/ 어찌 내 마음 내 말이야 뺏길까 보냐// 오로지 사람된 이여/ 내 마음을 한쪽 가지신이여/제 마음 나타내는 제 말을” 김지원의「제 말, 제 마음」전문이다.
강관순(康寬順 : 1909~1942)의 「海女의 노래」는 1932년 해녀사건을 전후에서 불려 진 노래가사이다. 일제 때 해녀들의 삶과 애환이 드러나 있어 서민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는 1926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강철(康哲)이란 필명으로 문예활동을 했으며 혁우동맹(革友同盟)에 관여하기도 했다.
1908년 11월에 발표된 최남선의 개화기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걸리버 여행기』(巨人國漂流記) 등 해양소설의 영향이 크다. 특히 바이런의 「대양」을 모방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어, 제주문학의 시발점에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
3. 4 ․ 3문학과 그 현실
“경찰은 산으로 도피한 자들을 쫓지 않고 바닷가 마을로 소개된 사람들을 체포해 한 장소에 모아놓고 눈을 감도록 한 뒤 매수한 사내에게 지목하게 하고 모두 죽여 버립니다. 이 무슨 참담한 지경입니까?” 시인이며 유학자인 김경종(金景鍾 ․ 1888-1962)이 이승만에게 4·3의 실상을 알리고 이를 막아줄 것을 호소하는 서한이다. 그의 저작『白首餘音』에는 당시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행패와 이승만의 책임을 서릿발처럼 비판하는 글이 곳곳에 남아있다. 4·3사건 당시 장남을 잃은 그는 1949년 이승만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에서 “군·경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즐긴다”며 군·경의 진압실태를 폭로했다. “이러한 말을 믿지 못하면 본인을 망언한 죄로 먼저 다스려달라”며 자신에게 책임을 먼저 물을 것을 요청한 그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쫓아내고 참혹하게 죽은 귀신들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1950년에 쓴 「이승만 성토문」에도 이승만의 학살책임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있다. “옛날 항적은 진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여 명을 살해하였다. 만세에 모두 무도하다고 일컫는다. 지금 이승만이 나라 안 죄수 수십 만여 명을 죽였으니 포학무도함이 항적과 더불어 어떠한가”라며 4·3 희생자와 한국전쟁 당시 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어찌하여 스스로 백성을 죽여 시체가 산과 같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게 하였는가. 모든 군자들이 나란히 성토에 호응하여 잔학함을 통렬히 벌주고 민족을 보호한다면 천만다행이다”
그는 4․3에 아들까지 잃고 그 비참한 감회를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산천 만 번 변하여도 물 동으로 흐르나니/ 옛 물가에 눈물 떨구며 아들 찾는 백발이여/ 절의는 이 해 맞아 충성스레 죽어가고/ 전쟁이 겁나고나 이날 누대 재 되었네/ 신명이 행여 타는 한스러운 맘을 알까/ 세상의 어지러움에 괜스레 더해진 근심/ 아들이 어딨는지 아아 아지 못하겠네/ 혼 되어 노닐었던 옛 동산을 향하는가” 그는 현재 문인협회와 비견할 수 있는 영주음사(瀛洲吟社)의 일원으로 활발한 시작활동을 하였고, 영주음사 사장도 역임하였다. 영주음사는 도내 문인 123명이 모여 1924년 봄에 설립한 문인단체이다.
4․3의 실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인구의 1/9에 해당하는 최소 3만 명이 학살당하고 130여 개 마을이 소각되었다. 극우반공주의자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섬 주민이 그렇게 당할 만한 일을 저질렀으니까 당한 것이 아니냐면서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수 만의 사람들은 자신이 왜 죽어가는 지도 모르면서 죽어갔다. 미국을 모르고, 미국의 세계전략도 모르고, 섬 주민들에게 몰살을 몰고 온 4․3은 도무지 이해불능이었다. 그들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 색으로 칠하여, ‘붉은 섬’ 혹은 ‘RED ISLAND' 라고 명명했는데, 그 붉은 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 대량학살을 그들은 ’RED HUNT'라고 불렀다.
4․3을 문학작품에 정면으로 드러내기에는 정치상황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인 김종원(金鍾元)은 1962년 『제주도』에 「奉蓋洞」을 발표한다. 비록 4․3에 대한 피상적 접근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 버려싱게/ 아홉 살 적 풋대추 찾아 기어오르던/ 안마당의 대추나무도/ 타 버려싱게// 날만 새면/ 거르지 않던 동네 식게/ 영장집 가마솥/ 인젠 찾아볼 수 어싱게// 가을이면/ 갈중이 풋감 물들이고/ 겨울 한낮엔/ 푹푹 내려쌓인 돌담 눈길로/ 키보다 큰 꼬리연 입김처럼 날리던/ 중산 부락/ 나의 봉아오름// 할아버지는 오척 단구/ 술 담배 입도 못 대신/ 대쪽 같은 선비/ 집 한 채 다 타고 잿더미만 남던/ 사삼 사건에도/ 눈시울 한번 안 적시더니// 안방 다락/ 이불 베개 삼던 漢書籍 다 타고/ 불꽃되어 날을 땐/ 손주처럼 발을 구르신/ 金海 金氏 문중의 어른/ 아, 그 법 없이도 살 수 있던/ 내 할아버지는/ 지금 봉아오름을 떠나고 어싱게// 타버려싱게/ 글만 알고 곡식 모르던/ 툇마루의 버선발/ 꿈심던 뒷마당의 죽순도/ 다 타버리고 어싱게”
70년대 들어 소설가 오성찬(吳成贊)의 「하얀 달빛」 (1971) ․ 「잃어버린 고향」 (1976년)과 현기영(玄基榮)의「아버지」(1975) 등이 4․3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 후 1978년 현기영이 「순이 삼촌」이 발표되면서 사태의 비극성이 문학형태로 재현되어갔고, 오성찬 ․ 현길언(玄吉彦)) ․ 고시홍(高時洪)도 이에 가세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현기영 ․ 현길언 ․ 오성찬 뿐만 아니라, 고시홍 ․ 김관후 ․ 김석희 ․ 오경훈 ․ 정순희 ․ 한림화 ․ 함승보 등이 4․3소설에 진입하기에 이른다.
시에 있어서도 여러 시인들에 의해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이 잇달아 발표된다. 그 중 김경홍(金京弘)의 시집 『인동꽃반지』(1999)는 주목할 만하다. “산간에 눈발 흩날리고/ 삐라 뚝뚝 떨어진다 / 날아오는 종달새야/ 내 죄명은 무엇이더냐/ 전향하면 살려준다는 최후 통첩이/ 살아서 부끄러운 목숨을 적신다” 「하산 ․ 1」에서 보듯이 그는 역사적 의미의 끈을 단단히 조이면서 아버지의 산에서의 체험과 뼈아픈 가족사를 담담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김명식 ․ 김용해 ․ 강덕환 ․ 김수열 ․ 고정국 ․ 김광렬 ․ 김석교 ․ 김순남 ․ 양영길 ․ 홍성운 외에 오승철 ․ 오영호 ․ 김순이 ․ 현주하 ․ 김성주 ․ 양전형 ․ 김병심 ․ 윤봉택 ․ 강중훈 등도 시 작업에 가세하면서, 4 ․3문학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4․3을 형상화한 희곡들도 발표되기 시작했는데 장일홍 ․ 강용준 ․ 김경훈의 작품들이 주목받을 만하다. 4․3을 소재로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쓴 이산하와 『순이 삼촌』의 현기영은 구속되어 당국의 조사를 받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제주문인협회에서 떨어져 나간 제주작가회는 4․3문학의 대장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예리하게 점검하면서 4․3문학의 중심에 선다. 『제주작가』를 통하여 4․3문학 특집을 마련하고, 4․3문학선집 간행을 통하여 계속 독자층을 넓혀나간다. 시선집 『바람처럼 까마귀처럼』을 시작으로 소설선집 『깊은 적막의 끝』, 희곡선집『당신의 눈물을 보여주세요』, 평론선집『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진실』을 간행하여, 4․3문학의 진정한 위상을 가다듬는 계기도 마련한다.
4․3에 대한 형상화의 경우 남한문학보다 북한문학에서부터 먼저 이루어졌다. 북한에서는 특히 4․3발발 시기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기간에 4․3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여러 편 발표되었다. 작품으로는 함세덕의 「산사람들」(1949~1950), 강승한의 서사시 「한나산」(1948)이 대표적이며, 안룔만의 「동백꽃」(1950), 박산운의 노래(1950), 임학수의 「남쪽 바다 섬을 생각하고」등의 시에서도 4․3을 형상화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에 나온 장편소설로는 김일우의 『한나산』(1896)과 양의선의 『한나의 메아리』가 있다.
현재 일본에서도 작품을 쓰고 있는 제주출신이 많다. 김석범(金石範) ․ 김시종(金時鐘) ․ 정인(鄭仁) ․ 양석일(梁石日) ․ 고찬유(高贊侑) ․ 원수일(元秀一) ․ 김중명(金重明) ․ 현월(玄月) ․ 카네시로 카즈키(金城一紀) ․ 김길호(金吉浩) ․ 김태생(金泰生) ․ 종추월(宗秋月) ․ 고정자(高貞子) ․ 허옥녀(許玉汝) ․ 김계자(金啓子) ․ 김창생(金蒼生) ․ 김마스미(金眞須美)) ․ 이양지(李良枝) 등이 시와 소설로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김석범은 4․3소설 『火山島』를 일본신문에 연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4. 50년대 이후 동인활동
지역문단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먼저 문단 형성의 토양이 가꾸어지고 거기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해방을 전후하여 귀향한 제주인들이 의욕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1946년 1월『新生』을 탄생시킨다. 제주출신 지식인들이 해방이후 최초로 발간한 종합지이다. 김이옥(金二玉 : 1918~1945)을 향토시인으로 명명하면서 그의 작품을 번역 소개하기도 하였다. 동인으로 참여한 이시형 ․ 이영구 ․ 최길두 등은 4․3와중에 희생되거나 그 여파로 문학활동을 중단하였다. 애월청년동맹의『新光』도 주목할 만하다. 그 후 제주문학은 한국전쟁 당시 ‘육지’의 문인들이 제주로 피란을 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특히 계용묵(桂鎔黙) 등이 문학 열기를 지폈다. 1950년대 제주도를 거쳐 간 문인으로는 계용묵 ․ 장수철(張壽哲))을 비롯하여 제주대학에 재직했던 김영삼(金永三) ․ 문덕수(文德守) ․ 박목월(朴木月)을 들 수 있다. 1960년대 함동선(咸東鮮) ․ 이성환(李星煥) 등이 제주대학에서 문학 강의를 하였으며, 고은(高銀)도 1964년부터 몇 년 동안 제주에서 생활하였다. 그중 전란 초기에 입도하여 서울 수복 후까지 제주생활을 이어온 계용묵의 영향은 매우 컸다. 그의 주위에는 항상 최현식(崔玄植) ․ 양중해(梁重海) ․ 이기형(李琪亨) ․ 고영일(高瀛一) ․ 강통원(姜通源) ․ 강군황(姜君璜) ․ 박철희(朴喆熙) ․ 김성주(金性柱) ․ 김영돈(金榮敦)등이 모여들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제주에서 처음으로 종합교양지 1952년 『新文化』와 처음으로 문학동인지 1953년 『黑珊瑚』가 탄생하였다. 그렇지만 계용묵이 적극적인 현실감각과 역사의식의 부재, 서민에 대한 관조적 시선에 빚은 현실감 결여라는 문제점이 제주문단에 영향을 끼친 사실에 아쉬움이 있다.
피난민들이 돌아가면서 제주문단은 오직 정열만이 자산이었다. 지방에서 문학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중앙문인을 경원하는 경향까지 보여주었다. 중앙에서 발행되는 『現代文學』과 『自由文學』의 지면이 할애되기는 쉽지 않았다. 지방문단의 활성화의 길은 동인지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중앙문단에 데뷔한 제주출신 문인은 시에 김대현(金大炫), 김종원, 양중해 세 사람이며, 1951년 제주도로 피난 온 최현식(崔玄植)은 소설로 데뷔한다. ‘중앙문단 공식시인 제1호’로 꼽히는 김종원은 1959년 『思想界』에 「달의 試業」등으로 등단한다.
50년대 시 동인지로 1958년 6월 문덕수 ․ 강통원 ․ 강시택 ․ 김종훈(金宗勳) ․ 양중해 등 다섯 사람이 『榧子林』을 창간하고 제2집으로 종간됐으며, 1959년 6월 구좌읍 출신 김대현(金大炫) ․ 이치근(李致根) ․ 부택훈(夫澤勛) ․ 정인수(鄭仁洙) ․ 오용수(吳容秀) 등 다섯 사람이『文珠蘭 』을, 그리고 1959년 10월 『詩作業』이 창간호가 나와 1960년 8월 제2집으로 종간되었다. 여기에는 도내 문학 동호인들은 물론 전국 기성문인들이 참여한다
60년대는 동인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61년 서귀포 지역에 거주하던 오성찬 ․ 정인수(鄭仁洙) ․ 강우성(姜羽聲) ․ 김태국(金泰國) ․ 오옥단(吳玉丹) 등이 『絶壁』동인을 조직하였으며, 이후 오성찬은 그들 동인들의 낭만이 깃들었던 생활을 『포구』라는 장편으로 작품화하기도 한다. 1963년 5월과 8월에 걸쳐 강통원 ․ 고영기 ․ 김종훈 ․ 이치근 ․ 박철희 등이 참여한 시 동인지 『亞熱帶』 제1 ․ 2집이 나왔으며, 박철희는 1961년 평론으로 데뷔한다. 그 후 1965년 김용해(金龍海) ․ 김용길 ․ 김덕남(金德男) ․ 구성지(具誠祉) ․ 고인명 ․ 김정자 여섯 사람이 동인지 『人』을 창간하였으며, 후에 문철(文喆) ․ 홍성화(洪性和) ․ 강천일 ․ 김학선(金學先) ․ 변정화(邊貞和) 등이 가세하여 동인지도 4집까지 낸다. 1968년부터 1974년까지 5회의 시사진전을 가진 『수레바퀴』와 1969년 4월 11일 네 사람이 첫모임을 시작한『토요구락부』도 빼놓을 수 없다. 해방 이후 60년대 말까지 25년간 제주사람으로서 등단한 이는 모두 11명에 불과하다.
그 후 1970년대 『正房』 ․ 『탱자꽃 모임』, 1980년대 『제주청년문학회』․ 『경작자대』․ 『한라산문학회』․『풀잎소리』․ 『초승』․ 『문섬』․『신세대』․『트임소리』, 1990년대 이후『귤림문학회』․ 『깨어있음의 시』 ․『다층문학동인』 ․ 『조엽문학회』 ․ 『정드리문학회』 ․ 『맷돌문학회』 ․『글터동인』 ․ 『녹담수필문학회』 ․『구좌문학회』, 『 글밭제주동인회』 ․ 『남제주문학회』 등이 활동을 펼친다. 그 중『귤림문학회』는 1990년 5월 결성되어, 그동안 매년『귤림문학』을 발간하고, 오현문학상도 시상하고 있으며, 『다층』동인은 1990년 ‘총체시의 창출’을 내걸고 출발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 계간문예지 『다층』을 발간하고 있다. ‘도서출판 다층’을 운영하면서 『다층시인선』․『따뜻한 시(詩) 시집총서』도 계속 발간하고 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장르별 문학단체로는 제주시조문학회 ․ 제주아동문학협회 ․ 제주수필문학회 ․ 제주여류수필문학회 등을 들 수 있다. 제주시조문학회는 1984년 3월 31일 정태무 ․ 김공천 ․ 김영흥 ․ 고응삼 ․ 이용상 ․ 오영호 ․ 고성기․ 오승철 등 8명으로 창립하여 매년 『제주시조』를 발간하고 있으며, 1991년부터 제주신문사와 공동으로 ‘제주시조 지상백일장’을 공모하고 있다. 제주아동문학협회는 1980년 2월 26일 창립하고 회지『새벽』을 발간하였으며, 1985년 4월 1일 『제주아동문학』을 창간하였다. 제주수필문학회는 1994년 5월 4일 창립하여 1997년부터 ‘제주수필 신인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1994년부터 『수필문학』을 매년 발간하고 있다. 제주여류수필문학회도 2002년 창립, 매년 작품모음집을 출간하고 있다.
5. 제주문협의 현실과 과제
한국문인협회는 1949년 결성된 한국문학가협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광복 이후 좌 ․ 우익간의 치열한 사상적 문학적 투쟁과 한국전쟁으로 문단분열이라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문협의 창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유 ․ 민족진영의 문학단체로서 순수성과 정통성을 지켜오고 있다. 1961년 12월 결성된 한국문인협회의 창립 취지는 문학인들이 역사적 사명을 인식하고, 표현의 자유와 권익옹호를 위하여 과거의 병폐를 일소하고 자율적으로 문학창조에 임하자는 것이다.
1948년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진보적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이 활동이 금지당하면서, 우리 문학은 문협을 이끌던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며, 이로부터 문학은 사람사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수문학이 정통으로 자리잡게 된다. 제주문학도 순수문학을 고집하는 계용묵이 등장하면서 제주문학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4․19혁명은 우리문학에도 큰 전기를 가져왔다. 우리가 놓여있는 현실을 바르게 보려는 노력, 잘못된 나라와 사회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각성이 문학에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4․19혁명은 좌절되었지만, 새로 등장한 군사독재의 엄혹한 통제도 이 싹을 자르지 못했다. 제주문단은 중앙문단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는다. 특히 제주문협은 한국문협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 지향하는 바를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가 되었다.
1960년 1월 제주문학인협회가 해체되고 새로 제주문학자협회가 창립된다. 민주화의 분위기를 틈타 1961년 3월 제주문협을 집단체제로 바꾸고 2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 대표위원을 선출했으나 5․16직후 해체되는 운명을 맞는다. 다시 1962년 1월 20일 제주미국문화원에서 제주문학협회가 창립총회를 열고 양중해(대표간사), 김영돈(총무간사), 강군황(사업간사)을 임원으로 선출하고 각 분과위원장을 뽑는다. 그리고 1968년 10월 한국문인협회로부터 지부 인준까지 받아 존속하다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에 의해 1970년 9월부터 해체상태가 된다. 1967년 3월부터 1968년 3월까지는 강통원, 그후 1970년 8월까지는 양중해가 대표간사였다.
그러다가 1972년 8월 30일 한라문화제를 계기로 제주문협이 재결속되었다. 20여 명이 제주시 ‘천호다방’에 모여, 한국문인협회제주도지부 설치안과 정관 개정, 신규 회원 확정, 주요 사업 계획 등을 수립한다.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임원진에 의해 문인협회로부터 지부 인준을 받았고, 그 해 12월 제주문협 기관지 『濟州文學』이 창간되었다. 다시 1998년 4월16일 한국문인협회로부터 한국문인협회 제주도지회 인준을 받음과 동시에 정관도 개정하였다. 산하단체로 제주시지부·서귀포지부·북제주군지부·남제주군지부를 두기로 하고, 단 제주시지부는 제주도지회가 겸임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1950년대 제주문학동호인회에서 제주문학인협회로, 1960년대 다시 제주문학자협회와 제주문학협회로, 1970년대 제주문인협회로 명칭이 바뀌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제주문학이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편 한국문학의 지평 위에서 보편성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한편 한국문인협회 하나로 흘러온 문학단체는 문학에서의 ‘실천’을 강조하는 목소리들이 불거지게 되었고, 1974년 창립된 자유실천문인협회를 확대 개편하여,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 흐름이 제주로 유입되면서 1998년 상당의 작가들이 제주작가회의로 이사를 했고,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동안 제주문인협회 역대회장을 역임한 사람은, 초대 강통원(‘67~’68), 2대 양중해(‘68~’70), 3대 강통원(‘72~’73), 4대 김시태(‘74~’75), 5대 김영화(‘76~’77), 6대 강통원(‘78~’79), 7대 문충성(‘80~’81), 8대 오성찬(‘82~’84), 9대,10대 한기팔(‘85~’89), 11대 김병택 (‘90~’92), 12대 정인수(‘93~’94), 13대 이용상 (‘95~’96), 14대 조명철(‘97~’98), 15대 문태길 (‘99~2001), 16대 김종두(2002~2004), 17대 고성기(2005~2006), 18대(현재) 강중훈 (2007~ ) 등이다
그리고 1972년 12월 25일은 『濟州文學』 창간호를 발간한 감격적인 날이다. 그동안 제주도에는 산발적인 문학 활동이 있어왔고 문학 내지 문화향상을 지향하는 잡지나 동인지 발간이 시도돼 왔다. 그러나 문학인 전체가 참가한 문학지 발간은 없었다.
창간호 목차를 보면 시에 강통원의 「濟州日記」․ 강갑길(姜甲吉)의 「어느 날 밤의 歷史」 ․ 고영기의 「海女의 겨울」 ․ 김양수(金良洙)의 「少女頌 」․ 김용길의 「가을은 가다말고」 ․ 김영환(金永桓)의 「正午의 환상」․ 박성원(朴成元)의「西歸浦 작은 하늘에」․ 오용수(吳容秀)의 「三冬詞」․ 정인수의 「裸木」․ 현춘식(玄春植)의 「魂詞」․ S.말라르메(文忠誠 역)의 「바다의 微風」등이며, 소설에 박수일(朴秀一)의 「솔내」․ 오경훈(吳景勳)의 「第3의 運命」․ 오성찬의 「아파트의 破約」․ 현길언의 「등애」․ 홍순만(洪淳晩)의 「854高地」등이며, 수필에 강군황의 「後輩들을 아끼는 마음」․ 김순자의 「어설픈 季節 」․ 정순희의 「선생의 월남치마」, 평론에 김시태의 「朴木月의 濟州詩篇」․ 김영화의 「濟州文學 序說」․ 송상일一의 「技術로서의 視点 」 등이다.
2008년 현재까지 『제주문학』은 제48집을 발간하였으며, 회원도 2백30명으로 늘어 대식구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제주문학상도 매년 수여하기 시작했는데, 제1회(2001년) 오성찬(소설집『보재기는 밤에 떠난다』), 제2회(2002년) 강통원(시집 『돌하르방』), 제3회(2003년) 한기팔(시집『말과 침묵사이』), 제4회(2004년) 박재형(동화집『다랑쉬 오름의 슬픈 노래』), 제5회(2005년) 양전형(시집『나는 둘이다』), 제6회(2006년) 송상홍 동시집『땅콩>』), 제7회(2007년) 김가영(수필집 『장미의 이름으로』) 등이다.
6. 맺는 말
지금까지 지역문학에 대한 논의는 중앙편중 현상에 대한 비판과, 각종 지원 정책의 경시풍조에 초점을 맞춰 논의해 왔다. 중앙집권적인 한국적 문단구조는 각종 문학매체부터 단체 활동과 강연, 모임, 평론가들에 의한 평가 등 모든 면에서 지역문학이 감점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문학은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단연 주류를 형성해 왔다. 근대 이후 한국문학사를 관류하고 있는 지역문학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작가를 보노라면 이미 중앙집권적 문단 구조는 허물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향후 우리가 지향하는 지역 간 특성 있는 문학균형발전 방안은 무엇인가.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다’라는 주장은 유효하며, 이러한 바탕 위에서 그 지역 특성에 맞는 문학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다.
지금 문화권은 문화권 나름대로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논의하면서 지방화 시대를 열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외래문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지방과 대칭되는 이른바 중앙문화에 증폭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역 시대를 맞아 문학균형발전은 문화의 확대에 초점이 모아져야 하며, 그 중심에 문학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제주도는 4․3을 체험한 역사적으로 아픔을 간직한 지역이다. 그래서 4․3문학이 지역문학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 되는지를 계속적으로 논의할 필요성을 느낀다. 슬프고 어두운 4․3의 기억을 작가는 어떻게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원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가 미래의 더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작가가 부단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사회는 물론 지역의 문제의식을 심도있게 짚고, 한국 현대사의 최대비극인 4·3의 올곧은 진실을 세상에 계속 알린다면 더 큰 문학의 미래가 도래할 것이다. 문학을 통한 생생한 현실인식과 인류문화에 대한 작가의 개방적 자세, 그리고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으로 참다운 문학운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올바른 작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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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관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