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라는 유령

‘빨갱이’라는 유령


김 관 후


지난 주말 초등학교 동창회 프로그램으로 도내 관광을 다녀왔다. 마지막 코스로 제주4·3편화공원을 찾았다. 동창들 중에는 제주4·3당시 부모를 잃거나 친족들을 떠나보낸 사람들이 십여 명이 넘었다. 소위 ‘빨갱이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일생을 살아온 동무들이다. 그들을 행방불명임 표석이 세워진 장소로 안내했다. 자신의 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표석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은 동창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짐을 느끼며 다시 제주4·3평화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는 조선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인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짓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여순사건 당시 제주출동거부병사위원회의 성명서 내용 중 일부이다.

제주4·3을 진압하기 위한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를 저지하기 위해 전라남도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군인들을 시작으로 '여순사건'(1948년)은 시작되었다. 아직도 우리 겨레의 가슴에 아픈 역사로 남아 있지만, 여순사건은 제주4.3과 그 뿌리가 닿아있다. 고립무원의 섬에 갇힌 제주 민중을 지지하고, 통일조국을 염원하면서 일으킨 의거란 점에서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최초 봉기에 참여한 2천여 명의 일반병사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14연대 병사들이 동참했고, 지역민중들이 함께 깃발을 들었다. 항쟁은 삽시간에 순천·광양·구례·보성·고흥·곡성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까지 확산됐다. 민중의 뿌리는 제주에서처럼 고립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화두로 등장한 '빨갱이'. <'빨갱이'의 탄생>(김득중, 선인, 2009)이라는 책이 최근 발간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국가의 탄생을 다룬 학술서적이다. 지은이는 여순사건을 통해 한국의 '빨갱이' 탄생을 재조명하고 반공국가의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운동이나 민족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지칭하였고,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빨갱이'. 가슴이 떨리고 내려앉는 단어이다. 61년 전에는 그 어떤 전염병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병이 '빨갱이'가 아니였을까? 이 병에 걸리면 100% 목숨을 잃고 가족과 친척까지 굴비처럼 엮여서 깊은 산골짜기나 바다에서 총에 맞아 죽어갔다. 삼대 혹은 그 이상으로 오랜 세월동안 '붉은 딱지'를 달고 살면서 국가로부터 연좌제로 옥죄어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다. 이 지독한 '빨갱이'라는 전염병이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기에 '비국민'인 '빨갱이'는 초법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세웠다. 이승만은 국민을 '좌'와 '우'로 나누어 '비국민'을 제거대상으로 보고, 각종 단체와 민주인사까지 '빨갱이'로 몰아서 정치보복과 학살을 자행했다고 지은이는 말하고 있다. 반면 국방부에서 간행한 공식 간행물에는 여순사건을 '여수 제14연대 남로당 세포들이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일으킨 군내의 쿠데타'이며 남로당 중앙과 지방 좌익들이 일으킨 반란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빨갱이. 남한 사회에서 빨갱이는 일차적인 사회악이며, 심지어 때려 죽여도 죄 될 것 없는 인간 이하의 존재였다.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은 그 빨갱이, 혹은 빨갱이를 만든 세력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60여년 동안 남한의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녀왔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저자의 결론은 "빨갱이는 ‘여순항쟁’이라는 기념비적이고 유혈적인 사건을 통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남한의 기득권 세력은 반대 세력인 공산주의자를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비인간, 같은 하늘 아래 살지 못할 존재'로 만드는 데 여순사건을 이용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여순사건을 통해 전면적으로 등장한 국가폭력은 빨갱이를 없애기는커녕, 끊임없이 빨갱이를 만들어냈다"고 강조한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관광문화해설사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동창들은 제주4·3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됐다며, 초등학교 시절 이승만 생일이 되면 그를 찬양하는 글짓기 대회에 참가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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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관후

2010/03/16 10:19 2010/03/1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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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들아 모여라

 

동무들아 모여라












 
김관후















저 산이 부르면 함께 가자







우뚝한 한라영산 우러러 보며






동무들과 목이 터지라고 소리지르며







창창한 대해수를 뒤에 다지니






서우봉이 저 멀리서 손짓한다







역사를 향하여 기침을 하며







떠난 동무를 불러 모은다







자그만 가슴에도 피가 흐르네







모두 떠난 아비 어미를 부르며








뼈아픈 무자년 역사 끌어안고







피맺힌 마음 끌어안고 서우봉으로 오른다








아침해 둥실둥실 비쳐오르니







물질하러 동해안으로 떠난 동무도







돈 벌러 서울로 떠난 동무도







밭도랑을 지키며 한숨만 짓던 동무도








서우봉 정기를 앞가슴에 받으며







세월을 모으고 사랑을 모으고









찬란한 강토를 자랑하면서







얼싸안고 어깨동무를 하고







과거를 찾아 오르고 또 오른다







우리는 대한의 착한 어린이







빛내자 함덕교 우리 힘으로







태극기 높이 들고 만세 부르며






모래밭을 밟으며 저 서우봉으로







오르고 도 오르면







밀항선 타고 일본으로 떠난 동무는







그곳에서 북송선에 올랐다는 소문만 들리고







대동강은 출렁거리며 우리 모두 물러대고






우리는 다시 떠난 동무를 부르며






다시 서우봉으로 오르고 또 오른다







동무들아 모여라







함덕교에 다시 모여라







새로운 역사, 통일의 역사가 눈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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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관후

2010/03/05 09:39 2010/03/05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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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김 관 후


아리랑은 한국의 대표적 민요의 하나이다. <아리랑>이라는 후렴이 들어 있는 구전민요이다. 민중생활의 순간순간의 비애와 애환을 반영하고 있으며, 조선 말기 이후부터 일제강점기에는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민족적 감정과 울분을 호소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근대 민요의 역할을 하였다.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경기아리랑》,《강원아리랑》,《정선(旌善)아리랑》.《춘천(春川)아리랑》,《밀양(密陽)아리랑》,《진도(珍島)아리랑》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지어 부르는 교포아리랑도 있는데 《독립군아리랑》 《연변(延邊)아리랑》이 그 예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밤 하늘 별처럼 생활에는 고통이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황혼 때까지/ 이별을 아쉬어하면서 시간을 보내자” 일본 아카섬에는 아리랑 고개가 있다. 왜 일본인들은 하필 아리랑 고개라 했을까?

일본강점기 시절, 특공대원들이 아카섬에 도착해서 1주일쯤 지났을 때 7명의 조선인 위안부도 섬에 잡혀왔다. 7명의 위안부 중 가장 나이어린 여자는 코마치, 18살이었다. 그리고 코하루와 미하루는 20살, 아케미가 23살, 시노부가 25살, 가장 나이가 많은 코하나는 30살 정도 됐을까? 그들이 아카섬에 있던 기간은 3개월여에 불과하다. 1945년 2월 27일, 해상전진기지 제2대대 독립대대가, 오키나와로 이동했을 때 7명의 여자들도 같이 끌려갔다.

이들 위안부와 성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던 사람은 장교와 하사관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위안부를 둘 때 섬사람들이 반대가 있었지만 “그러면 섬의 아가씨들이 강간당하게 된다”고 협박했다. 특공대원들은 무거운 배터리를 지고 고개를 넘었으며, 휴식시간에는 조선출신의 대원한테서 ‘아리랑’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래서 이 고개를 ‘아리랑 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장교의 인솔이 없을 때 불러진 노래이다.

또 있다. 오키나와에서 처음으로 조선인 위안부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패전 후, 오키니와가 1972년에 본토에 복귀함으로써 배봉기라는 한국인이 불법체류자가 되어 강제송환의 대상이 되었다. 배봉기씨는 강제송환을 두려워하고 특별재류 허가를 신청했기 때문에 위안부로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연행 당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1990년대이며 배봉기씨가 1991년 77살로 돌아간 후였다.

“매미가 울어 호박이 꽃이 피는/ 나의 고향/ 아름답고 순정한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열무 오이김치/ 절임 잘하고 요리 잘하고/ 꼼꼼하게 일하고 기량이 좋다/ 언젠가 사내아이도 여자이이도 주시겠지요/ 사랑스러운 아가끼”

노래가사는 평온한 가정에서 검소하게 사는 여자의 모습이다. 배봉기씨는 수십 년 만에 일본 토카키시섬 항구주변을 찾았지만 옛 풍경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항구 주변을 한 바퀴 돌아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걸음을 멈추었다. 배봉기씨의 시선은 숨 그늘의 시냇물에 멈추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세탁물을 냇물에 헹구면서 자주 노래를 불렀다. 그는 한곡을 또 뽑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올 3월 25일부터 26일까지 일본 오키나와현 좌마미촌에서는 ‘오카나와전 65년-3.26 아카섬 평화제’가 열린다. 첫째 날 아카섬 아리랑 평화제에서는 제주에서 건너간 제주명창 안복자씨가 아리랑 메들리를 부르고, 둘째 날 합동위령제에서는 백록민속예술단 한춘자씨가 무속 춤으로, 최길복씨가 살풀이로 관중들 앞에 선다. 이 행사는 1945년 3월 26일 8시4분 미군이 아카섬에 상륙해서 오키나와전이 시작된 날을 기념하여 올해 처음 시작하는 행사이다. 특히 이 행사는 일본에 있는 제주4·3을 생각하는 모임 ‘한라산회’ 고문이신 나가다 이사무 JR서일본노동조합중앙본부 특별집행위원의 역할이 컸다. 나가다 집행위원은 작년부터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제주4·3위령제에도 참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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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관후

2010/03/01 11:36 2010/03/0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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